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비판 또는 한계 === 그러나 키케로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행보는 "유산자들", 달리 말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부유한 이들의 결속과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권력 분립 및 원로원의 권위를 옹호하는 일에 거의 모든 초점이 맞춰졌으며, 종류를 불문한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무심했고[* 다만 당대 로마 정계를 주름잡던 인사들의 시각으론 그의 주장 또한 아래로부터 요구였을 것이다. 일종의 아이러니.][* 사실 키케로의 주장 자체는 철저히 기득권의 이득에 부합했다. 다만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원로원 파는 그의 주장 자체는 이용해 먹으면서도 정작 키케로 개인의 위기에 대해서는 자신들과 같은 명문 귀족이 아닌 기사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심하게 대했다. 키케로 본인은 이런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더욱더 그들과 같은 카테고리에 엮이고 싶어 했다.] 그런 요구에 부합하는 일을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깨트리는 [[포풀라레스]][* 흔히 민중파로 번역되며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로 여겨지나, 사실 당대 로마에서 이 단어는 '민중을 선동해 로마를 혼란에 빠트리고 왕이 되려는 꿍꿍이를 지닌 몹쓸 놈'쯤의 의미를 지닌 욕설이었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바로 포퓰리즘으로 역시나 포풀라레스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다.]적 행위로 여겨 비난했다. 이는 그의 역사관에서 기인하는데, 키케로는 아테네의 민주정이 시민에게 지나친 자유가 부여돼 그것이 방종으로 치달은 끝에 몰락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는 페르시아를 등에 업은 스파르타의 침략과 이로 인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에 불어온 역병 등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오히려 스파르타에 의해 참주정이 세워졌으나 1년밖에 가지 못하고 도로 민주정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아테네는 그간의 피해 덕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어느 정도의 힘은 유지했고 무엇보다 힘을 잃은 후에도 문화, 교육, 예술 도시로서 명성은 그대로 유지했다. 당장 리케이온의 설립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모두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일이다.] 때문에 그가 진정으로 긍정한 자유는 원로원 그리고 그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설파한 유산 계급의 자유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인민의 자유란 진정한 자유가 허락된 원로원의 권위를 그대로 따르는 자유이다.[* 과거 로마 공화정 시대의 파트로누스와 클라엔테스 간의 관계를 알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당시 로마에서 시행되던 비밀무기명투표에 부정적이었으나 해당 법률의 철폐가 불가능하기에 차선책으로 사전에 투표의 내용을 상위 계급 인사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시민들의 방종을 억제하면서도 시민들에게 비밀무기명투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비밀무기명투표를 법제화한 호민관을 형편없는 인물로 취급하며 맹비난했다. 그런 그에게 인민의 자유란 방종일 뿐이었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유산자와 무산자가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상태를 깨트리는 죄악일 뿐이었다. 그가 주장한 원로원과 기사 계급 나아가 전 이탈리아 유산자의 조화와 결합은 이런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적극 저지하고 침묵시킴으로써 그가 평생의 이상으로 여긴 '권위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또한 그가 주장한 혼합정에서 인민 즉 민주정이란 하나의 구성 요소이자 견제 요소로서만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당대 로마의 사정을 고려하면, 이는 그의 치명적인 한계였다. 일례로 키케로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클로디우스]]와 대립하던 시기 그의 지지자로 수공업자, 소상점주, 임금노동자, 고용인 등을 지목하며 이들의 저급한 성품을 강조해 이런 자들에게 지지받는 클로디우스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일에 몰두했다. 현존하는 클로디우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그 시대 최고 최대의 사료원이자 클로디우스의 정적이었던 키케로의 저술을 1차 사료로 삼은 탓에 클로디우스를 오로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날뛰는 무법자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이전 글에 언급된 플루타르코스는 클로디우스와 키케로가 활동한 공화정 말기가 아닌, 그로부터 대략 150년 후 오현제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후대 인물인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을 집필하며 필연적으로 키케로의 저서를 참고했을 것이며, 키케로의 시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다른 후대 사가도 사정은 마찬가지. 참고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를 '뻔뻔스럽고 경멸스러운 괴물'로 평했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을 오로지 무법자로만 묘사된 클로디우스의 이미지가 현실의 클로디우스와 완벽하게 부합하리라 생각하지 않으며, 여러 이유에서 그의 이미지가 적잖이 왜곡됐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관점을 달리하면 클로디우스를 하층민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 그들의 영웅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클로디우스가 정적 밀로가 이끄는 무리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은 로마에 큰 파장을 일으켜 군중에 의해 원로원 회의장이 전소되고 폼페이우스가 질서 회복을 위해 단독 집정관에 취임하는 결과를 낳았다.[* 참고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의 목숨을 앗아간 밀로를 '훌륭하고 우아한 신사'로 평하며 그를 변호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단독 집정관은 로마법을 어긴 행위이다. 로마에서 집정관은 반드시 2명을 뽑고 1명을 뽑을 때는 반드시 독재관의 직책으로 대신해야 하기 때문. 집정관은 임기도 길고 또, 평시에 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독재를 하기에는 단독 집정관 쪽이 훨씬 위험했다.] 또한 클로디우스는 단순히 포풀라레스적 행위를 통한 민중 선동만이 아닌 기사 계급과 원로원 의원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광범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룩해 삼두와 옵티마테스라는 거대 세력 사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수완을 선보인 그 나름의 체계와 합리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대조적으로 키케로의 기록에선 클로디우스의 무법자적이고 포풀라레스적인 면모만이 두드러질 뿐, 광범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룩한 그의 정치적 수완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광범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룩할 수 있는 수완을 갖추지 못했다면, 클로디우스가 그토록 수월하게 키케로의 정치 경력을 파괴하진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키케로와 클로디우스는 정적 관계였으므로 그가 적은 클로디우스의 기록에 사감이 끼어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 영향으로 정적인 클로디우스를 적극 비난하고 그의 정책에 격렬히 반대하던 키케로는 종국엔 클로디우스도, 그와 연대했던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도 아닌 옵티마테스 측 인사들의 개입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해야 했다. 이후에도 키케로는 클로디우스가 제정한 곡물법에 따라 무상 곡물을 지급받기 위해 모인 가난한 시민들을 '민회에 집단으로 참석하여 국가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저 비참한 반아사의 거머리들인 근성이 더러운 평민들', '먼지를 뒤집어쓴, 더러운 도시의 인간 쓰레기들', '배 밑에 괸 더러운 물과 같은 도시의 쓰레기들', '가난에 찌들고 몸을 닦지 않는 자들', '사악한 자들' 로 묘사할 만큼 이들을 멸시했으며, 천하고 지저분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 적극 참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 둘의 사이를 중재할 카이사르의 부재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갈등이 극에 달해 삼두의 연합 체제가 붕괴 직전에 도달했던 기원전 56년, 카이사르의 압력에서 벗어날 기회를 포착했다고 여긴 키케로는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가 집정관 재임기에 제정한 일정 자격을 갖춘 빈민을 수혜 대상으로 한 농지법을 공격하는 취지의 연설을 했고, 추가 연설을 공표함으로써 당시 로마를 떠나있던 카이사르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 시도는 최종적으로 카이사르의 개입으로 삼두 모두에게 득이 되는 협의안이 도출되면서 좌절된다.] 공정을 기해 말하자면, 키케로가 카이사르가 제정한 농지법에서 문제 삼은 사항은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법안이 발효됨으로써 공유지가 줄어들어 국고 수입이 감소한다는 것이었으며 이 행위에 내포된 정치적 의도도 간과해선 안 되겠으나,[* 더 공정을 기하자면, 카이사르의 주도로 자격 요건을 충족하는 빈민에게 분배된 공유지를 사유화하다시피 했던 원로원 의원을 위시한 세력가들이 규정된 임차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실제 국고 수입 감소분은 명목상 수치에 미치지 못했으리란 사실도 언급해야 했을 것이다.] 빈민을 수혜 대상으로 한 농지법을 재기의 표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키케로가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얼마나 무심했고 또 부정적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증명하듯 키케로는 국가란 유산자의 사유재산을 옹호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주장했으며, 하층민이 유산자로 구성된 원로원의 권위를 그대로 따르는 상태의 국가를 이상적으로 여기며 그런 질서가 무너진 인민의 자유는 방종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키케로는 호민관을 인민이 원로원의 권위에 반발하거나 불만에 차 날뛰지 않도록 달래는 데에 그 존재 의의가 있는 정무직으로 여겼다. 이런 생각은 '''공화주의보다는 플라톤의 철인론에 더 가깝다. 키케로의 생각은 현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일인독재는 경계하지만 민중의 실질적 정치 참여를 봉쇄하는 엘리트 집단지도체제에 더 가깝다.'''[* 또 플라톤의 철인론은 지도자의 부패를 방지하는 방안에도 고심했다는 점에서, 유산자의 결합을 촉구한 키케로의 국가론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둬야만 키케로가 그라쿠스 형제, 특히 그가 최초의 포풀라레스로 규정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비난한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즉 키케로의 관점에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인민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제어하고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그들을 달랜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호민관의 직분에서 벗어나,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함으로써 로마의 국론을 양분시킨 인물이기에 비난한 것이다. 또한 키케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으로 과거 인민이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는 조화롭고 이상적인 로마의 권위있는 질서가 무너지고 지금의 혼란이 도래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저서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비난하고 울분을 토했으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준동 이전의 공화정 로마를 평생의 이상향으로 여겼다. 그러나 키케로의 생각과 달리,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시절 민회에서 호민관직의 존재 의의는 인민의 권리 보호임을 강변했다. 물론 이 말이 정치적 수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나, 피상적이나마 그의 사상을 엿볼 기회를 제공하며, 키케로의 이상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이상도 존중받아 마땅할 것이다.[* 호민관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귀족들에게 치우쳐서 귀족과 평민간 차별대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완화하기 위한 것으로 무엇보다 호민관은 귀족이나 원로원이 던져준 게 아니라 평민들의 투쟁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또한 키케로가 나름대로 개혁안을 제시했다고 하나, 그것은 그가 필생의 염원으로 삼은 원로원과 이탈리아의 유산자를 아우르는 유산 계급의 화합 촉구나 이상적으로 여긴 정치 체제 성립에 국한된다. 키케로는 소위 포풀라레스 인사들을 민중을 선동해 민심을 등에 업고 참주 등극을 꿈꾸는 악당이자 로마에 혼란을 불러오는 암적인 존재로 취급했는데, 그가 선한자들이라고 칭한 옵티마테스로 대표되는 당대 로마의 실세들은 [[원로원 최종권고]]와 같은 초법적 권한을 사용해 그들이 적이라고 규정한 인사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표적으로 이 조치가 최초로 시행됐을 때, 그의 지지자 3천여 명은 문자 그대로 몰살당하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의 머리를 가져온 이는 같은 무게의 황금을 주겠다는 보상이 제시됨에 따라 목이 잘리고 머리 내부가 납으로 채워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일이 마무리되자 당년도 집정관이자 이 사태를 일으킨 주역인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는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자신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화합의 여신 콩코르디아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립했다. 그러나 대체로 이 일은 그가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정제로 여긴 아테네의 중우정의 폐단이나 비판한 참주정의 폐단 못지않게 과두정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럼에도 후대에 헌법주의자로 명성이 자자한 키케로는 정작 자신의 공적을 위해 이 일을 가능케 한 초법적 권한을 확대 적용했고 그 후폭풍으로 몰락하게 된다. 또 자신의 저술을 통해 그리고 후대인들의 손에 의해 한껏 이상화된 키케로가 실제로는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일화가 있다. 시기는 그가 법무관을 역임한 기원전 66년, 전직 법무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케르]]란 인물이 직권 남용 혐의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빈약해 무죄가 유력해 보였던 이 재판을 주재한 키케로는 화려한 웅변으로 배심원단을 설득해 마케르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일이 이렇게 진행된 데에는 마케르의 과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케르는 과거 호민관을 역임하며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나름의 농지법을 주장하는 등 소위 포풀라레스적 행보를 보여 논란의 대상이 됐는데, 키케로는 장래를 염두에 두고 마케르에게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를 언짢게 여기던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한 것이다. 키케로가 재판을 끝내고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의도가 잘 드러난다. "마케르 소송을 취급해 사람들[* 아마 마케르를 언짢게 여긴 유산 계급, 범위를 좁힌다면 지주 계급 인사들]에게서 놀라울 정도의 지지를 얻었소. 그에게 나쁜 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죄를 선고해 마케르에게서 감사를 받는 것보다 유죄를 선고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소." 덧붙여서 이 사건의 결말은, 키케로에게 의외의 유죄를 선고받은 마케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런 실례는 키케로가 평생의 이상으로 여긴 '권위 있는 질서'가 도래한 로마가 도대체 어떤 나라일지 의구심을 품게 하며,[* 냉소적으로 말해, 키케로는 자신이 최상위 지배계급에 속하는 속주에 머무를 때나 현실의 압박에서 벗어난 저술 활동에 전념할 때 가장 공정했고 다소나마 인민의 유익함을 챙기는 마음 씀씀이를 보여줬다.] 동시에 이런 사례들은 동시대인들이 대체로 키케로를 기회주의자적 인물로 여긴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일례로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키케로를 "그가 원하는 것을 주고, 그에게 아첨하고, 그를 칭찬하는 인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예속적인 상태도 참고 견딜" 인물로 평했다.] 마지막으로 키케로가 내놓은 개혁안은 당대 로마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딱히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있다고 평하기 힘들며, 키케로가 인민의 유익함을 등한시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여러 일화를 고려하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권위 있는 질서'로 대변되는 키케로의 주장 및 개혁안은 정부와 유산자의 이해관계를 제외한 사안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 키케로의 주장 및 개혁안은 자신이 악이라 여긴 포풀라레스적 행위를 도려내고 이상적이라 여긴 형태로 구현된 체제의 건전성을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기존의 귀족들과 신흥 부유층인 기사계급 그리고 민중간의 격차와 갈등, 안건이 상정될 때마다 극심한 소란을 일으킨 제대병에 대한 보상 문제, 이탈리아인과 속주민에 대한 처우, 제국으로 팽창한 현실에 부합하는 행정력의 미비 등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것이 키케로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 이후 도래했다고 믿은 혼란이 생겨나고 지속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은 이러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으며, 키케로의 정적 카이사르가 로마 영역 전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것은 진의가 뭐든 이러한 문제 해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케로나 그가 동류로 인정받길 원했던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이런 문제에 무심했거나 적절한 해결안을 내놓지 못했으며, 이런 관심과 능력의 미비야말로 그가 경멸한 포풀라레스들의 준동을 카이사르의 부상을 최종적으로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수립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물론 키케로처럼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등 개인으로선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인사들이 존재했으나, 당시 로마는 개개인의 성공이 아닌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거시적이고 광범위한 개혁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당대 로마가 직면한 여러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대해선 실효성이 있는 의견을 내놓지 못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을 도리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 원인으로 여겨 그를 비난했다. 로마 공화정은 어차피 망할 운명이었다는 운명론적 역사관을 배격한다고 해도,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지 못한 공화정이 무너졌음을 감안하면 제정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뿐만 아니라 키케로를 비롯한 공화파 인사들에게도 공화정 붕괴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